'현(現)정권의 설계사' 류우익 전(前) 대통령 비서실장
"대통령 생각 잘 정리해 그분 어투로 쓸 수 있어 연설문 작성 도맡아와"
"낚시하고 골프도 치는 대통령 모습 보여줘야… 재산 환원 곧 이뤄질것"
"오늘이 청와대에서 나온 지 1년하고 이틀이 됐다. 이걸 어떻게 알고 연락했나."날짜 계산을 해 인터뷰를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류우익(59) 전 대통령 비서실장(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은 앉자마자, 나름대로 지켜온 '자숙(自肅)'에 대해 말했다.
"그동안 인터뷰는 물론이고 정부업무와 관련된 공식 행사에 나간 적이 없다. 동창회나 조카 결혼식에도 안 갔다. 이제 1년이 됐으니, 굳이 피할 것까지 없지 않느냐 생각했다."
그는 '한반도 대운하' 등 현 정권의 핵심 정책을 설계했던 인물이다. 정권 출범 초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청와대 군기반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불과 3개월로 끝났다. 촛불 정국과 그에 따른 인적 쇄신 요구로 낙마했던 것이다.
―작년 촛불시위는 정권 출범 직후 최대 위기였고 당신을 물러나게 했다. 청와대는 처음 이 사태를 어떻게 판단했나?
"선거 결과에 심정적으로 승복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저항 반발하는 것으로 봤다. 어느 정도 반발하다가 곧 수그러들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머리에 구멍이 뚫린다는 선동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먹혀들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학자 출신이어서 그렇게 순수하게 봤다. 한국정치의 어려운 부분을 그때 직면했던 셈이다."
―류 전 실장이 대통령 연설문을 도맡아 써왔다고 들었다. "청와대 뒷산에서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진 것을 바라보고, 함성과 함께 오래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 노랫소리도 들으며…"라는 연설문도 당신 작품인가?
"후보시절 경선과 본선 때 내가 주로 직접 썼다. 내 글이 유려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 대통령의 생각을 잘 정리하고 그분의 어투에 가깝게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연설문에는 내가 관여를 안 했다. 이 연설은 두 번째 사과였다. 한나라당(黨)과 여러 채널에서 '큰일 났다. 사과하는 게 좋겠다'는 요청이 와서 이뤄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 번째 사과는 안 했으면 했다. 나는 이미 손을 놓고 (그만두기 위해) 정리할 때였다."
―세간의 사람들은 그때 '대통령이 시위세력에 겁먹었구나' 하고 여겼다.
"비서실장인 내가 '이 상황에는 정치적 배경이 있고 허위 조작에 기초하기 때문에 오래 안 간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겁먹었다는 것이 말이 되나. 다만 이런 국면으로 계속 갈 수 없고 한나라당이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 내가 인사 개편을 건의했다."
―당시 청와대가 경찰의 미온적인 진압방식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경찰 수뇌부가 말을 안 들었나?
"우리는 정권 교체 불만 세력이 카타르시스를 하는 걸로, 한 가지 빌미를 잡은 걸로 인식했다. 그래서 최소한 질서만 유지하면 곧 수그러질 것으로 봤다. 이를 공세적으로 진압해 또 다른 국론 분열, 불행한 사태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과격한 진압을 하면 저들의 의도에 말려 정치투쟁이 되는 것이다.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그런 판단으로 인해 2개월 이상 서울 도심이 마비되고 약 3조원 이상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다. 상황을 방치한 것은 정권의 무책임이 아닌가?
"방치한 것은 아니다. 불가피하거나 당연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번 '조문 정국'도 결과적으로 그런 것이 아닌가. 거기서 '독재' 소리가 나오고 정치화하려는 세력이 있는데, 함께 말릴 필요가 있느냐.
정치적 반대자를 몰아세우고 진압하는 식으로는 사회가 안정되기 어렵다. 이보다는 불만을 토로하게 하고, 토로했으니 해소되고 혹은 설득되기도 하는 것이다. 강경 일변도로 가면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우리는 반대세력과 싸우는 게 아니라 나라를 끌어가는 게 목적이다."
―이 대통령은 한쪽에서는 '오만과 독선'으로, 다른 쪽에서는 '우유부단'으로 비판받는다. 당신이 모셔본 입장에서 대통령은 어느 쪽인가?
"이분은 평생 협상을 하고 딜(거래)을 하면서 살아왔다. 사업이란 100을 원하다가, 상대가 60을 제시하면 80, 75로 협상하는 것이다. 비즈니스맨은 상대를 죽이는 협상을 하지 않는다. 함께 공존 상생하는 데 능숙하다. 대통령은 겉으로 나타난 외모와 불도저 이미지 때문에 오만과 독선 소릴 듣는 것이다.
한편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은 대통령의 고심을 간단하게 두부 자르듯 하는 것이다. 요즘 정책 사안은 환경·안보·경쟁력·문화 등이 서로 얽혀 있다. 결단에 이르기까지 신중할 수밖에 없다. 복잡한 사안의 한 단면만을 보고 '왜 시간을 끄느냐'며 참지 못하는 격이다."
―좌파는 조직적 반발을 하고 우파는 실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 정권은 그 해법으로 '중도강화론'을 내세웠다.
"좌우 이념을 일직선에 놓고, 좌우의 클릭 수로 따지는 것은 과거 잣대를 미래에 대고 있는 격이다. 단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논의 단계를 올려야 한다. 대통령은 전 국민을 끌어안아야 할 의무와 과제가 있다. 체제 부정세력까지는 아니지만, 가급적 많은 국민들을 말이다."
―보수 이념으로는 많은 국민들을 끌어안을 수 없다는 뜻인가?
"보수를 하면서 이들을 끌어안으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데 일부 극우에서는 대통령의 스탠스가 좌(左)로 간 것처럼 말하고, 반대세력에서는 '부자 정권'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실제 중산층·서민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중도실용은 보수가 외연(外延)을 넓혀간다는 뜻이다."
―지도자는 손해를 보더라도 밀고 나가야 할 것이 있다. 그런데 '협상'을 잘하는 이 대통령은 손익계산이나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상을 준다.
"현 정부는 보수정권으로 태어났고, 처음부터 그걸 선언하고 선거를 치렀다. 이념은 협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가 정체성을 어떻게 협상하나. 다만 정책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유연성을 갖고 서민들을 끌어안는 쪽으로 가는 것이다."
- ▲ 서울대에서 만난 류우익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께서 대운하를 ‘절대’안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국회의원 시절부터 정책을 같이 이야기했다. 서울시장을 할 때는 시정자문단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대선 전 이분이 설립한 국제정책연구원(GSI)을 내가 맡았다. 여기서 현 정권의 정책이 많이 논의돼 '정권 설계사'라는 말까지 듣게 됐다."
곽승준 청와대 미래기획위원장,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 김영우 한나라당 의원 등이 국제정책연구원 출신이다.
―류 전 실장이 먼저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제안한 것인가?
"큰 정책은 어디서 시작됐다고 말하기 어렵다. 누가 특허권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대선 국면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정권 출범하자마자 '대운하 구상'이 꺾여 버렸을 때 당신의 실망이 몹시 컸을 것 같다.
"경선·본선을 거치면서 뜨거운 논쟁을 했다. 사실 관계에 기초한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우위에 서기 위한 논쟁으로 흘렀다. 경선에서 반대 진영 사람들은 운하에서도 반대했고, 본선에서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무조건 반대했다. 그러다가 촛불 정국에서 완전히 추동력을 잃게 됐다. 하지만 정책도 진화를 한다. '4대강 살리기'가 대운하에서 진화한 것이다. 업그레이드한 것으로 나는 본다."
―대운하 계획이 진화한 게 '4대강 살리기'란 뜻인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대운하 구상이 현실에서 수정돼, 정책의 중점이 물류와 관광에서 물 관리와 수질 개선으로 가 있는 것이다."
―분명하게 이는 대운하인가 아닌가?
"정책은 실현 가능할 때 하는 것이다. 대통령도 '국민의 동의가 없으면 안 하겠다'고 말했다. 그 입장은 그대로일 것이다. 4대강 살리기는 대운하와 많이 겹치지만, 정식으로 운하를 하려면 별도의 공사가 더 필요하다."
―상당수 국민들이 '4대강 살리기'를 대운하로 의심하고, 이는 사회적 갈등과 분란이 되고 있다. 대운하가 아니라면, 왜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대운하를 '절대' 안 한다는 식으로, 정치인은 단정적인 말을 할 수가 없다. 지금은 그렇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런 고민이 있을 것이다."
―대통령실장 재임 시절 청와대 직원들에게 '노 홀리데이(no holiday)'를 요구하고, 근무실태를 암행감찰하고, 대통령 해외순방 때 새벽 출근 비상을 거는 등 '군기반장'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원망을 듣는다. 지나가는 말로 '이런 판국에 골프 치는 사람은 없겠지만' 한 것이 골프금지령이 됐다. 하지만 10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는데 청와대가 안이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비교적 빨리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정상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대통령이 낚시도 하고 골프를 치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
―당시 청와대 직원들을 모아놓고 "힘, 욕망, 감정을 절제하라"는 '훈시'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공직을 맡은 사람은 자기 절제 없이 봉사할 수 없다. 나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봉사하겠다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지도층 공복(公僕)은 스스로 절제하고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어떻게 해서 본인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다고 들었나?
"난 선거 기간 중 당(黨)에도 캠프에도 관여 안 했다. 오직 정책을 생산하는 '국제정책연구원' 일만 했다. 내가 비서실장이 될 줄은 몰랐다. 사전에 대통령이 상의한 적이 없었다. 청와대 인사를 발표하는 바로 그날 아침에 임태희 정책위의장을 통해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
―그런데 정두언 의원이 당신을 향해 "권력을 사유화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고르고 골라 앉혀 놓았더니 또 다른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다"라며. 어떻게 된 것인가?
"사람이란 심한 얘기를 할 수도 있다. 정 의원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반성할 일이고. 그는 표현을 열정적이고 직설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사실 관계를 묻고 있다.
"대통령이 지나가는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류 교수는 사심은 없잖아'라고 한 적이 있는데, 사람이 어찌 욕심이 없겠는가. 다만 절제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난 정당인도 정치인도 아니고, 사유화를 할 만큼 패거리를 데리고 다닐 인물도 못 된다. 정 의원은 자신이 생각한 인선(人選) 구도에 안 맞는 게 있어 그랬던 것 같다. 선거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고 보좌도 했던 정 의원으로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주변의 교수들을 내각이나 청와대에 많이 집어넣지 않았는가?
"내가 집어넣고말고 한 게 없다. 인사에 대해 내가 전혀 몰랐다면 거짓말이지만, 대통령이 물으면 난 대답하는 위치에 있었다. 대통령이 교수들의 장단점을 더 잘 안다. 내가 진짜 정치를 하려고 덤볐다면, '젊은 사람이 이래야 되겠나'며 정 의원에게 맞받았을 것이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그 친구 이상하지 않나'고 했을 때도, '뭐 그럴 수 있지'라고 했다."
―청와대를 떠나서도 가끔 이 대통령과 만나나?
"세계지리학회 사무총장에 재선된 뒤 대통령의 축하전화를 받았다. '영토 문제도 있으니 집행위원들을 서울로 초청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집행위원들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간 적이 있다. 또 한번은 재산 사회 환원과 관련해 만난 적이 있다."
―대통령은 재산을 그냥 기부하면 되지, 왜 이렇게 시일을 끌고 있나?
"대통령의 재산이 부동산이다. 가치 평가도 돼야 하고, 임대차 및 담보 문제도 있고, 법률적으로 검토할 게 많았다. 재산 기부는 내가 쭉 얘기를 해온 것이라 틀림없다. 곧 행동으로 보여줄 것이다."
―대학으로 복귀할 때 '폴리페서(정치교수)'라며 학생들의 반대가 심했다. 요즘 또 정부로의 복귀설이 떠돈다.
"내 전공이 지역 정책이라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정책 자문을 해왔다. 정책에 관여하지 않는 교수들과는 학문에 대한 시각이 처음부터 다르다. 내게 '폴리페서'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걸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런 비판이 없다면 대학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