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각 안세운 박근혜]
MB 공약 vs 朴의 공약… MB 약속 안지킨 건 비판, "公約 할거냐"엔 즉답 피해
부산과 대구 사이… 밀양도 가덕도도 지명은 전혀 언급안해
세종시와 신공항… "세종시는 法의 문제, 이번엔 공약 어긴 것"
朴의 화법 정치… "어느 쪽도 자극 않고 정치적 최대치 끌어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31일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에서 열린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원장 취임식에 참석했다. 원래부터 잡혀 있던 일정이었다. 정부가 전날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를 발표하자 박 전 대표 측에선 "대구 방문 중 신공항 문제에 관한 박 전 대표의 입장 표명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었다.이날 박 전 대표가 밝힌 입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신공항 추진을 공약했다가 백지화한 것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 유감스럽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을 거둬들인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이란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대신 "정부나 정치권이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아야 우리나라가 예측 가능한 국가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 ▲ 이명박 대통령이 1일 오전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동남권 신공항을 백지화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지난 31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국세청에서 열린 제2회 공정사회 추진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행사장을 향하다 잠시 서있는 모습.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박 전 대표는 전날에도 대구 출신 의원 11명이 신공항 백지화를 규탄하면서 이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할 때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 '대통령'을 직접 걸고 들어갔던 것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공약을 지키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이 늘 강조해온 '원칙을 지키는 모습'은 보이려 했다.
두 번째로 박 전 대표는 "지금 당장은 경제성이 없다고 하지만 미래에는 분명 필요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신공항 문제를 미래의 과제로 규정한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앞으로 (대선)공약으로 내걸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계속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선 공약에 넣겠다, 아니다 하는 즉답 대신 '계속 추진'이라는 우회적 표현을 썼다.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고 대선 공약으로 넣을지 여부는 가능성으로 남겨 놓으면서 '미래의 국익'을 내건 박 전 대표의 화법을 두고 여권에선 '영남권 표'를 의식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영남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는 박 전 대표로서는 지역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과 대구를 비롯해 심상치 않은 영남 여론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차기 유력한 대권주자로서 국익도 고려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딱 부러진 입장을 밝힐 수는 없었다.
박 전 대표는 영남권 여론도 대구·경북과 부산으로 갈라져 첨예하게 맞서 있기 때문에 양측이 지원하던 경남 밀양이나 부산 가덕도 어느 쪽 편에도 서지 않았다. 짧은 기자들과의 문답 어디에서도 두 지명이 단 한 번도 입에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세 번째, 박 전 대표는 신공항 문제가 세종시와 다르다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세종시와 (신공항을) 좀 다르게 보는 것 같은데"라는 질문에 "세종시는 법으로 국회에서 통과된 것이고, 이번 공항 문제는 공약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세종시는 자신이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때 국회를 통과한 특별법이라 강제력이 있는데 이 대통령이 이를 수정하려니까 강하게 반대했지만 '신공항'은 이 대통령이 내건 공약을 현 정부가 스스로 거둬들인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대통령이 공약을 못 지키면 박 전 대표는 나중에라도 자신의 공약으로 이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사생결단식으로 나설 일은 아니라고 봤다.
한 친박 인사는 "박 전 대표의 발언은 어느 쪽도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치적 최대치를 끌어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오랜 준비를 거쳐 나온 것 같다"고 했다. 박 전 대표의 한 핵심 측근은 "이 대통령과 충돌하지 않고 지역민들의 이해도 충족시키는 표현들을 찾기 위해 애썼다"며 "일부에서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에 대항한다느니 반발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박 전 대표가 국민 신뢰를 언급한 것은 '박근혜식 원칙'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일부의 오해를 없애기 위해 밤늦게까지 측근들을 통해 "정책적 측면에서 말한 것이지, 이 대통령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잘못된 공약은 고백하고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자 애국"이라며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공약을 내걸었다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잘못된 것임을 알고 '내가 큰 거짓말을 했다'며 수정했다"고 박 전 대표를 비판했다. 김문수 경기지사도 "공약이 잘못된 것을 알고 나면 이를 진솔하게 사과하고 바로잡는 것도 신뢰를 쌓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