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창균 논설위원
2011년 이집트, 1987년 한국…
나라 결딴날 위기감 속에 여야 간 극적 개헌 합의 도출
非타협과 불신 풍토 속에서 유행 따라
건물 손질하듯 헌법 고칠 수 있겠나
나라가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던 이집트 정국이 '개헌'이라는 요술 방망이 덕에 실마리가 풀릴 것 같은 분위기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항구 집권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왔고 심지어 부자(父子) 세습까지 꿈꾸게 했던 대통령 선출방식을 손보기로 하면서 파국(破局)을 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돌아가는 이집트 사정을 대한민국의 집권 주류(主流) 세력은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권의 이인자인 이재오 특임장관은 작년 8월 입각 직후부터 "개헌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고 있고, 이명박 대통령까지 연두 방송좌담회에서 "개헌 아직 늦지 않았다"며 지원에 나섰는데도 좀처럼 동력(動力)이 붙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이집트 상황은 1987년 6월의 대한민국을 생각나게 한다. 대통령 간선제를 통해서 친구들끼리 정권을 나눠 가지려 했던 군부 정권에 맞서 넥타이 부대까지 거리로 뛰쳐나왔다. 외신(外信)은 한국에서 또 한 차례 유혈 진압이 재연될지 모른다는 음울한 시나리오를 전송하고 있었다. 권력을 주고받으려던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여당 후보가 직선제 개헌이라는 합작 타협안을 내놓으면서 6월 항쟁은 극적인 탈출구를 찾게 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헌법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2011년 2월의 이집트, 1987년 6월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나란히 놓고 보면 왜 2011년 대한민국에선 개헌이 어려운 것인지 유추할 수 있다. 헌법을 손질해 권력 구조를 바꾸는 일은 현 제도 아래서 다음 권력을 차지할 가능성이 큰 사람에겐 달가운 일이 아니다. 1987년 대한민국 군부정권이 7년 임기 간선제 대통령제 헌법을 지키려 했던 것은 그 제도 아래서는 손쉽게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야권은 그 헌법으로는 도저히 정권을 차지할 수 없으니 극한투쟁에 나섰던 것이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결딴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여야가 공유하게 됐을 때 개헌이라는 합의 도출이 이뤄졌던 것이다. 정치적 타협의 문화가 성숙돼 있지 않고, 정치 세력 간의 신뢰도가 극도로 낮은 나라에서 개헌은 이처럼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섰을 때만 가능하다. 헌법은 아파트 지은 지 오래됐다고 시대에 맞게 그때그때 리모델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유력한 대선주자와 그 진영이 개헌에 반대하다, 일단 정권을 잡고 나면 권력 분산형 개헌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우리 정치사의 불변의 법칙인 듯하다. 임기를 마쳐가는 대통령과 주류 세력은 입맛에 안 맞는 차기 주자에게 자신이 누렸던 강력한 권한을 그대로 물려주기 싫은 것이고, 대통령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주자들은 대통령과 주류 세력이 개헌이라는 대형 이슈를 통해 정치판을 흔들려 한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8·9·10일 사흘에 걸쳐 '개헌 끝장토론' 의원총회를 열고 있다. 개헌 추진론자들은 의총 첫날인 8일 당 소속 의원 171명 중 130명 안팎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뤘다고 나름 뿌듯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총에 참석한 90여명 친이(親李) 의원 중 상당수는 개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난 총선 때 실질적인 공천권을 행사하며 자신에게 금배지를 달아준 이재오 장관에 대한 인간적 의리 때문에 개헌에 찬성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친박(親朴) 중 얼굴을 내민 30여명은 개헌 반대 입장 속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 보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야당은 "여권 내에서 먼저 합의해오면" 개헌 게임에 동참하겠다는 입장이니 개헌에 필요한 '재적의원 299명 중 200명 찬성'은 도저히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
요즘 개헌 전도사라고 불리는 이재오 특임장관도 2007년 대선 전에는 개헌 불가 입장이었다. 2007년 1월 24일 당시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라디오 시사프로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추진에 대해 "한나라당이 개헌에 반대하기 때문에 국회 의결 정족수인 재적 과반수는 채울 수가 없다. 번연히 통과 안 되는 줄 알면서 개헌안을 발의하는 것은 고집밖에 안 되며 다른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만일 친박과 야당 의원들이 이 장관에게 이 장관이 5년 전 했던 말을 되던진다면 이 장관은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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