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

촛불 뒤의 '배후세력'은 누구인가

goldking57 2008. 5. 31. 10:12
[송희영 칼럼] 촛불 뒤의 '배후세력'은 누구인가
소통 실패, 광우병 불안만으로
요즘의 '민심 逆流' 설명 안돼
글로벌화 10년 경쟁체제 속에서
두껍게 형성된 피해 집단을 봐야
송희영 논설실장
입력 : 2008.05.30 18:34 / 수정 : 2008.05.30 21:59
▲ 송희영 논설실장

심야 거리 시위가 장기화하자 정부가 '배후세력' 색출에 나섰다. 촛불이 수그러들지 않는 배경에는 좌파나 진보 단체들의 음모가 있다고 믿는 것 같다.

10년간 정권을 잃었던 입장에서는 저들의 관중 동원 능력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보수 세력 안에서는 '어떻게 되찾은 정권인데…'라는 안타까움과 '또다시 좌파의 괴담성 여론몰이에 밀리다니…'라는 분한 마음이 복잡하게 요동치는 시절이다.

쇠고기 파동은 그러나 배후 몇몇을 체포해 끝날 일은 아니다. 청와대 정무와 소통 기능을 보완하고 장관 한두 명 제물로 바친다고 민심이 깔끔하게 돌아서지도 않을 듯하다.

광우병으로 죽을 확률, 벼락 맞을 확률을 까마득한 소수점 이하까지 따지며 어린 학생과 주부, 샐러리맨들의 반(反)과학적 두뇌를 탓한들 무슨 소용이랴. 이는 두 번의 선거에서 승리를 선물했던 유권자를 모욕하는 배신일 뿐이다. 몰표를 주면 '무서운 민심'을 칭송하다가, 하는 일이 막히면 '무식한 민심'을 통탄한다는 말인가.

이번 민심 폭발에 이명박 팀과 보수 세력만 당황한 것은 아니다. 민주당과 진보 단체, 좌파들도 내심 당황하고 있다.

기죽어 지내던 운동권 스타들이 모처럼 축제 만난 듯 거리에서, 진보 매체에서 환한 표정으로 등장하지만, 한 야당의원은 "총선 때까지 냉랭하다가 왜 뒤늦게 민심이 발동했는지 솔직히 알 수 없다"고 털어놨다. 반갑지만 뭔가 찜찜하다고 한다.

거리 민심은 원자탄이라도 투하한 듯하건만, 민주당민노당 지지율이나 진보 단체에 대한 신뢰도는 상승할 기미가 없다. 탄핵 사태 때 깃발 흔들던 진보 단체들은 촛불 무대를 장악하지 못한 채 젊은 시위대에 얹혀 따라다니는 처지다. 이명박 정권이 죽 쑤는 판에서 좌파-진보 진영이 황금 대박을 터뜨리지 못하는 셈이다.

여론 조사 전문가들은 민심 역류(逆流) 현상의 이유를 몇 가지 꼽는다. 청와대와 내각 인선의 실패, 재벌-부자 편향적인 정책, 대통령과 장관의 중량감 없는 언행, 경기 회복에 대한 희망 상실… 등. 방정맞게 설치던 집권세력에 대한 쌓이고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터졌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미시적인 접근만으로는 잘 잡히지 않는다. 그보다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에 형성된 불만 집단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라가 온통 글로벌 경쟁 체제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면서 '힘들고 피곤하다'는 집단이 우리 이웃에 모였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반(反)글로벌화 세력이랄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너스도 못 받고, 시간외 수당도 못 받고, 유급 휴가도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 숫자가 56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 중 7할 안팎은 국민연금도, 건강보험도, 실업보험도 없는 상태에서 언제든 밑바닥 빈곤층으로 추락할 벼랑 끝에 매달려 있다.

'미국은커녕 하다못해 인도네시아에도 유학 가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대학생 그룹이 있는가 하면, 샐러리맨들은 '지금 몇 살인데 승진 때마다 토익 시험을 봐야 한다는 말이냐'고 불만을 품고 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면 유치원 입학 전부터 엄마와 함께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팔자가 되고, 성인이 되어서도 MBA 자격증, 연봉제, 성과급, 구조조정, 조기퇴직이라는 고문 틀 속에서 버텨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글로벌화에 대한 반발 정서가 온 사회에 깔리게 된 꼴이다.

세계화 반발 집단은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다. 불만과 분노의 질(質)까지 달라졌다. 자유무역협정 논란 속에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에게 돈을 더 벌게 해주려고 광우병 쇠고기를 먹으라는 말이냐"고 반문하는 얘기가 나왔다. '너의 행복이 나에게는 불행'이라는 반감이 강하다는 방증이다.

글로벌화 추세에 적응하지 못한 계층이 희생을 거부하고 개방에 저항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게다가 반글로벌화 정서는 '지내고 보니 나만 피해자가 됐다'는 체험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에게 취직 통보서가 배달되고 지갑에 현찰이 들어가기 전에는, 'FTA가 되면 일자리가 몇 십만 개 창출되고 몇% 성장한다'는 두루뭉술한 논리는 쉽게 먹혀들지 않는다.

외환 위기 때 우리 사회는 빅뱅(대폭발)을 경험했다. 그 후 글로벌화 전략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피해 계층은 두껍게 자리잡았다.

쇠고기 파동은 이 집단이 결코 분노를 감추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들은 또 한 번의 빅뱅으로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앞으로도 세계화의 큰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촛불'의 배후에서 힘들어하는 집단에도 더욱 애정어린 접근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