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대권

동서남북] ‘이명박 VS 이명박’

goldking57 2007. 10. 11. 11:23
동서남북] ‘이명박 VS 이명박’
  • 주용중 정치부 차장대우 midway@chosun.com
    입력 : 2007.10.10 22:39
    • ▲ 주용중 정치부 차장대우
    • 이번 대선은 도무지 대선 같지가 않다. D-69일로 어느덧 종반인데 결승점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사람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뿐이다. 다른 후보들은 까마득하다. 아직 몸을 풀고 있거나 갓 출발한 정도다.

      이 후보만큼이나 승리를 따 놓은 당상으로 여겼던 사람이 1948년 미국에서 야당인 공화당 후보로 나선 토머스 듀이(Dewey)다. 듀이는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해리 트루먼(Truman) 대통령에게 줄곧 20%포인트 이상 앞섰다. 미 국민들은 16년째 집권하고 있던 민주당에 염증을 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주당의 헨리 월러스와 스톰 서몬드는 트루먼과 싸우고 당을 뛰쳐나가 각자 출마했다.

      그해 듀이의 낙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팔불출 취급을 받았다. 10월 11일자 ‘뉴스위크’는 50명의 정치 전문가 중 50명이 듀이의 승리를 예측하는 기사를 실었다. ‘타임’은 주(州) 선거인단을 듀이가 350명, 트루먼이 38명 차지할 것으로 분석했다. 인명록 ‘Who’s Who’ 1949년판은 성급하게 듀이의 주소를 백악관으로 찍어서 뿌렸다. 트루먼의 부인 베스마저 “남편이 다시 백악관에 돌아오기는 어렵다”고 했다.

      첫째, 듀이는 집권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듀이의 최측근 존 포스터 덜레스는 선거가 끝나기도 전에 순조로운 정권이양을 논의하자며 조지 마셜 국무장관을 불러냈다.

      둘째, 듀이는 행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봐 몸을 사렸다. “트루먼은 100% 무시해도 됩니다. 그와 다투지 마세요”라는 측근 건의를 충실하게 따랐다. 그의 연설이 너무 맨송맨송하자 한 신문의 사설은 “듀이 연설의 핵심은 당연한 얘기뿐”이라고 꼬집었다.

      셋째, 듀이의 유세 열차 이름은 ‘Victory Special’이었다. 열차에 동승한 듀이의 측근 41명은 저녁마다 마티니를 마시며 카드놀이를 했다. ‘특별한 승리’를 미리 자축한 것이다.

      넷째, 공화당 내 골수 보수파들은 당초 듀이 대신 2차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후보로 영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들은 운(運)이 너무 좋은 듀이 캠프의 선거운동을 먼 산 바라보듯 했다.

      다섯째, 승리를 확신한 건 듀이와 듀이의 측근만이 아니다. 투표 당일 공화당 우세지역인 일리노이와 캘리포니아에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자 공화당원들은 투표장에 가지 않았다.

      ‘듀이가 트루먼을 꺾었다.’ ‘시카고 트리뷴’은 개표가 끝나기도 전에 1면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그러나 다음날 당선 연설을 한 사람은 트루먼이었다. 트루먼은 연단에서 시카고 트리뷴을 손으로 펼쳐 보이며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대세론과 그 대세론의 허망함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했다.

      60년 전의 미국 대선과 올해의 한국 대선은 달라도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이 후보를 보면 자꾸 듀이가 생각난다. 이 후보의 요즘 선거 전략 중 하나도 ‘집권 모드’다.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려 했던 이유도 야당 후보가 아니라 차기 대통령으로 비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후보 사람들은 ‘부자 몸조심’이다. 시간이 어서 흐르기만을 기다릴 뿐 좀처럼 이슈와 쟁점을 만들지 않는다. “일부 이 후보측 인사들이 벌써 파티 중인 것 아니냐”는 소곤거림이 들리기도 한다. 게다가 한나라당 박근혜 캠프의 일부 인사들은 여전히 1948년의 공화당 보수파와 비슷한 심정, 비슷한 태도다.

      1948년 대선을 미국 정치학자들은 ‘트루먼의 기적’이라 부른다. 이명박 후보가 상대방에게 기적을 안겨주는 제2의 듀이 같은 존재가 되느냐 안 되느냐, 그건 이 후보가 얼마나 자기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하느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