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vs 후쿠다...이명박 vs 박근혜
후쿠다야스오(福田康夫)가 일본 자민당 총재로 어제 선출되었군요.
중참 합동총회에서의 330-196이라는 스코어가 말해주듯이 비교적 여유있는 승리입니다. 후쿠다의
총재 당선은 일본 자민당 내 9개 계파 중 무려 8개 계파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이 결정적 승부수로
작용했습니다. 반면, 아소타로(麻生太郞)는 '아베신조(安倍晉三) 총리와 닮은 꼴'이라는 이미지와 최근 아베의 '아소에게 속았다' 발언 등으로 구설수에 오른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일본 자민당내 거의 모든 파벌의 압도적 지지를 얻은 것은 일본 정치 사상 매우 드문 일입니다.
제 기억으로도 오오히라마사요시(大平正芳) 사망 이후 재연된 다께시타(다나까파)-아베신타로(아베신조의 아버지, 후쿠다파)의 '제 2 가쿠후쿠(角福, 다나까가쿠에이의 가쿠角, 후쿠다다케오의 후쿠福을 따온 표현) 전쟁'으로 인한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소수파였던 스즈키젠코(鈴木善幸)를 총리로 임명한 이후 처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당시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만큼 자민당이 위기라는 것이죠.
흥미로운 것은 아베 총리와 이번에 새롭게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후쿠다가 모두 자민당 내 최대계파인 '마찌무라파' 소속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베와 닮은 꼴' 이야기를 듣는 아소는 '아소파'를 이끌고 있습니다. 정적을 끌어안는 것이 일본 정치의 오랜 전통임을 감안할 때 총리선거 최대의 경쟁자였던 후쿠다를 간사장이나 외무대신으로 임명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아소를 기용한 것만 보더라도 아베가 후쿠다를 얼마나 의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후쿠다가 얼마나 두려웠으면 자신과 다른 계파인 사람을 2인자로 기용했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배신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마찌무라파'라는 것이 대단히 흥미로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마찌무라파'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후쿠다파'(70후~80중) => '아베파'(80중~90중) => '모리파'(90중~00중) => '마찌무라파'(2007년 이후)로 이어집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후쿠다와 아베가 모두 계파의 적통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후쿠다야스오는 계파의 시조에 해당하는 후쿠다다께오(福田赴夫)의 아들이며, 아베신조 역시 한때 계파를 이끌었던 아베신타로(安倍晉太郞)의 아들입니다. 보다 심층적인 요인을 분석해보자면 누가 계파의 주인이냐의 자존심 대결까지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정치권 일각에서는 후쿠다의 등장으로 '제3의 가쿠후쿠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후쿠다야스오는 '가쿠후쿠 전쟁'의 당사자였던 후쿠다다케오의 아들이고, 현재 민주당 대표로 있는 오자와이찌로(小澤一郞)는 '제 2 가쿠후쿠 전쟁' 당시 '다나까파'의 2인자로서 자민당 간사장으로 있었던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계에 현역으로 있는 인물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나까가쿠에이(田中角榮)의 문하생입니다. 그리고 '유연함과 섬세함'의 대명사였던 후쿠다의 기질과 '통 큰 보스정치'의 대명사였던 다나까의 성향이 각각 아들과 제자에게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치가 다시 요동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가쿠후쿠 전쟁'은 자민당내 헤게모니 싸움이었지만 지금은 여야로 나뉘어 정권유지와 정권교체를 놓고 혈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베가 총리에 오르게 된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내각의 2인자인 관방장관 경력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민당 내 3역인 간사장-정조회장-총무회장 중 하나를 역임하고 대장상(재무장관)-외무상(외무장관) 중 하나를 역임한 인물 중에서 총리를 뽑아오던 기존 관행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것도 50세 초반에 정계입문 13년에 불과한 사람을... 60~70대 정치인들이 판치는 일본 정치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왜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이것 역시 오자와이치로를 빼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오자와의 대중성과 지도력은 대다수 일본인들에게 이미 검증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과거 자민당과 정권을 놓고 다투었던 호소카와, 하타, 무라야마 등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입니다. 40대 초반에 자민당 간사장을 역임한 만큼 자민당 내 역학관계와 정치적 생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다나카 전 총리로부터 대중성과 지도력에 대해 완벽하게 전수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같은 그의 성향과 자질을 자민당 내 국회의원들 중 상당수가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베 대세론'이 급격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때마침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후쿠다-오자와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자민당 소속의원들이 아베에게 기대를 걸었던 이유는 크게 세가지입니다. 첫째, 일본 역사상 가장 인기가 높았던 고이즈미로부터 '대중성'을 확실하게 전수받았을 것이라는 믿음이고, 둘째, '다나까파'와 더불어 자민당 내 양대 파벌이었던 '후쿠다파'의 적통을 그가 이어받았다는 것이고, 셋째, 북핵위기와 납북자문제로 일본사회의 우경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흐름에 편승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이유로 자민당 의원 200명 이상이 '아베 지지선언'을 하였고, 산께이-요미우리-닛께이 등 보수언론들이 연일 '아베 대세론'을 띄운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모리파'(지금의 '마찌무라파')의 수장인 모리요시로오(森喜郞) 전 총리가 사실상 후쿠다야스오를 차기 총리로 지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파소속 국회의원 상당수가 '아베 지지 선언'을 하는 항명이 벌어졌습니다. '아베 대세론'을 빌미로 아베 진영이 노골적인 줄세우기를 하였고, 자민당 의원들 대다수는 힘없이 무너져내렸습니다.
'고이즈미의 후계자'로 일찍 지목된 아베 진영이 이를 무기삼아 노골적인 줄세우기를 하고, 아베로는 오자와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한 모리-다케베-야마사키 등 자민당 내 원로그룹 또한 '후쿠다 옹립'을 포기하지 않자 '反아베'의 선두주자였던 후쿠다는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후쿠다는 자민당 및 '마찌무라파'의 분열을 묵과할 수 없다며 '총리 불출마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아베가 최대 라이벌인 후쿠다를 배제한 상황에서 아소-다니가끼 등 군소후보들과 경합 끝에 대승을 거두어 총리에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 정치의 오랜 흐름을 설명한 이유는 이것이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글을 꼼꼼히 읽어내려오신 분들이라면 그 어떠한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아베에게 이명박을 대입하고, 후쿠다에게 박근혜를 대입하면 한국 정치상황과 거의 맞아떨어집니다.
다만 한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의 경우 이미 상황이 벌어진 다음인 과거형이고, 한국의 경우 아직 대선을 3개월 앞두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일본 자민당 소속의원들과 보수성향 유권자들에게 1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차기총리를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대다수는 아베가 아닌 후쿠다를 선택할 것입니다. 더욱이,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용퇴한 사람'(후쿠다)과 '자신이 힘들다고 돌연 사임하여 당을 위기에 빠트린 사람'(아베)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는 일본인들의 정서를 놓고 볼 때에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작년 9월에 일본 자민당 소속의원들과 보수언론들은 오자와에게 맞서기 위해 오자와보다 더욱 대중적이고 더 통 큰 정치를 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아베를 총리로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단히 참담했습니다. 아베는 오자와보다 더 대중적으로 어필할 기회조자 얻지 못했고, 통 큰 정치를 실현할 타이밍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잇따른 정치스캔들과 내각의 도덕적 해이 속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참의원 선거에서 전무후무한 참패를 기록함으로써 자민당만의 고유영역이었던 '안정성'과 '신중함'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자민당이 갖고있는 장점을 활용하기 보다는 남이 갖고 있는 장점을 뺏어오려는 것에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습니다. 그래서 다시 '안정성'과 '신중함'을 극대화할 수 있는 후쿠다에게로 당심이 몰리게 된 것입니다.
한나라당 지지자들 중에서 이명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심리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통 큰 개혁'과 '통 큰 안보'는 결코 한나라당다움을 살릴 수 있는 노선이 아닙니다. '통 큰 것'을 기대하는 사름들은 북한의 김정일을 찾거나 남한의 노무현을 찾으면 됩니다. 굳이 그런 것을 한나라당에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한나라당은 보수정당으로서의 장점을 십분 살리어 '안정성'과 '신중함'으로 국정을 이끌겠다는 포부를 국민들 앞에 명확히 전달하면 됩니다. '통 큰 것'과 '안정적이면서도 신중한 것'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국민들에게 선택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번에 이명박을 후보로 선출함으로써 더 이상 '안정적이면서도 신중한 것'은 내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통 큰 것'을 놓고 김대중과 노무현의 후계자로 결정될 사람과 우열을 가려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십니까? 이미 그 해답을 일본이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당과 국가를 위해 책임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과 자신을 위해 당과 국가를 위기에 빠트리는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갈릴 것인지도 일본 정치가 명백하게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자민당 소속의원들은 한나라당 소속의원들보다 현명한지도 모릅니다.
이제라도 후쿠다의 진가를 제대로 알았으니까 말이죠. 일본 국민에게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베가 아닌 후쿠다를 선택할 것이 자명한데... 한국은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도 주어져있는데 박근혜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도, 그러한 선택을 하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 정당과 그런 나라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박근혜는 한나라당과 대한민국이 가장 소중하다고 합니다. 정말로 눈물이 날 만큼 우직한 모습입니다. 자민당과 한나라당이 이처럼 다르고, 일본과 한국이 이처럼 다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와 후쿠다는 거의 동일한 모습이라는 점이 필자에게는 큰 격려가 됩니다.
그러면서 막연하게나마 생각해봅니다. 후쿠다와 같은 지도자가 역사의 부름을 받았듯이 박근혜와 같은 지도자 역시 반드시 역사의 부름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대한민국이 잘 될려면...
국민들이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 했습니다.